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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날

등록일 2024-07-11 작성자 관리자 조회 564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귀촉도수록

가을이 오고 있는 9월이다. 맑고 깨끗한 고국의 하늘은 너무 눈이 부셔서, 외국에 오래 나가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눈물겨운 계절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나는 “저기 저기 저” 하는 말도 안 되는 말, 가을 풍경에 얼이 빠진 시인의 당황이 그렇게도 좋다. 미당의 고향마을의 발음으로 다시 한번 외워 본다. 과연 그는 시인이다. 

마종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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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것 앞에서 인간의 자아는 숨을 멈춘다. 무한한 아름다움이 기쁨보다는 절망을 주는 이유다(알베르 카뮈). 그러나 또 자아의 죽음은 무한에의 동참, 열락이기도 하다.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이 마법 같은 시구에는 어떤 논리적, 의미론적 인과관계도 없다. 논리를 뛰어넘는 비논리의 일탈이 시정을 묘하게 잡아당기고 그리움을 더욱 무한하게 한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들고 눈이, 봄이 또 오고 내가 죽고서 네가 살거나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는 것—다 무한이 하는 일. 오직 인간의 그리움만이 그 무한의 문을 넘어간다. 그리워요 당신, 이라고. 

김승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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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리듬감이 강하기 때문에 굳이 멜로디를 붙이지 않아도, 선율 없는 상태에서도 이미 노래인 시. 「푸르른 날」은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송창식이 부른 노래도 절창이고 시도 절창이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하! 초록이 지쳐 단풍 든다니!
한국 시사詩史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명품 시구다. 과연 서정주 선생은 언어의 연금술사, 한국어를 자신의 육체에 새긴 시인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단순성 안에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굉장히 단순한 형식의 이 시에서도 삶과 죽음을 항상 겹으로 의식하고 있었던 시인답게 ‘존재의 유한성’을 환기시키며, 허무감과 그에 따른, 현재 감정에 몰입하자는 쾌락주의를 선동하누나.

이 순간만이 아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면 어때, 봄이면 또 어때, 길이 그대가 그리우리! 그리움의 이러한 시간적 보편성을 따르자면, 이세상과 저세상으로 나뉘어 있어도 그리워할 수 있다고 4연을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둘 중 하나가 죽으면 이 그리움이 다 무슨 소용이랴, 언제 네가 죽을지 내가 죽을지 모르니까 우리 둘 다 살아 있는 이 순간 그리움을 다 펼쳐내자꾸나, 이것이 시인이 노래한 뜻일 테다.

시의 시작과 끝에 되풀이되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리운’은 형용사고 ‘그리워하자’는 동사다. ‘그립다’는 형용사가 ‘그리워하다’라는 동사로 바뀔 때 그 과정에서 능동성이 생긴다. 그리운 마음이 생기면 절제하지 말고 그리워하라! 그리움을 폭발시켜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길지 않으리!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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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의 노래로 유명한 시. 아예 노래를 만들라고 지은 시 같다. 4행의 “초록이 지쳐”와 3행의 “저기 저기 저”는 똑같이 5음절. 가을 꽃자리를 가리키려면 “저기 저”로 충분한데, ‘저기’를 한 번 더 반복해 뒤에 오는 행과 운율이 완벽해졌다.

여고 시절 나의 애송시를 손으로 베껴 쓰다 “가을 꽃자리” 뒤에 ‘초록이 짙어’를 입력하고는 아차! 내 기억의 잘못을 발견했다. ‘짙어’가 아니라 ‘지쳐’가 맞는다.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 여름에서 가을로의 변화를 이보다 더 멋지게 표현할 수는 없다. 4행의 초록과 단풍을 지나 5행에 ‘눈이’ 내리고 6행에 ‘봄이’ 나온다. 짧은 시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 있다.

결코 지칠 것 같지 않던 청춘, 푸르던 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태풍이 지난 뒤 맑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난 시. 「푸르른 날」한 편만으로도 시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어떤 소재든 주물러 작품을 만드는 미당 선생의 무서운 솜씨.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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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푸른 신록의 계절에도, 눈부신 햇살과 단풍의 계절에도 이 시만 보면 그리움 환하게 물들어온다. 환한 햇살 앙다문 여린 잎새 그늘처럼, 단풍 그늘처럼. 한글 아니면 흉내 낼 수 없는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에 이르면 5음보 율격律格과 풍격風格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한글의 맛과 멋과 오묘함을 한껏 드러낸 시. 하여 서정주 시인을 ‘한국 시의 정부’, ‘부족 방언의 요술사’라 이르는가. 여하튼 시인이 남긴 1천여 시 편편을 읽으면 우주 삼라만상과 귀신도 탄복할 신명 깃들어 있거늘. 

이경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