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guk University
가을에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低俗에 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항雁行—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항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白露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의 피비린내 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은 또 한번 뒷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신라초』(1961) 수록
※
떠나는 것은 돌아오는 것인가. 천년을 울린 학의 목청으로 이 나라의 산과 물 다 흔드시던 미당(未堂)선생, 삼천 사발 사랑의 정한수 떠놓던 반려를 여의고 외기러기로 하늘길 날아 낯선 땅에 가시려 하더니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있는 이땅에 사시려 자리에 누우셨다. 우리 마지막 국화꽃-올해 또 새것이 피듯 다시 일어나시어 우리 "국화옆에서" 향기 높은 가락 울리소서.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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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는 가을을 맞이한 자에 대한 지극한 위로와 고무가 담겨 있다.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 이"라는 구절에서 '아직도 오히려'가 강조된 까닭은 고통 속에서 인생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뜻한다. 이 문장은 삶의 무수한 고통을 이겨낸 당신은 여전히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냐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아울러 그런 당신이라면 고통의 징표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을 부정하지 않으며 앞으로 닥쳐올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수 있다는 위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물드는 가을을 삶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으로 헤맴이 계속되는 계절 앞에서 시인은 독자에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엄경희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