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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옆에서

등록일 2024-11-20 작성자 관리자 조회 887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었나 보다

-서정주시선(1956) 수록

 

봄과 여름의 계절, 그리고 누님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이 나에게 오면 ‘간밤’이라는 아주 가까운 시간이 되고, 가슴 조이는 그 의미 역시 무서리와 직접 연결된다. 시가 진행되어 갈수록 먼 데서 가까운 곳으로, 넓은 데서 좁은 데로 국화는 우리 옆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는 「국화 옆에서」의 그 ‘옆’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국화 속에서는 모든 생명을 죽이는 서리가 오히려 꽃을 피우는 초월의 힘으로 작용한다. 누님도 나도 이 서리의 역반응에 의해서 비로소 삶의 ‘노란 꽃잎’은 그 아름다움을 얻는다. 누님의 그 노란 꽃잎이 여성으로서의 최종적인 아름다움의 도달점이라고 한다면 잠 오지 않은 간밤의 무서리 속에서 피어나는 ‘나’의 그 노란 꽃잎은 시인이 고통 속에서 얻어낸 아름다운 몇 줄의 시일 것이다. 

이어령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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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3학년이 되어 새로 오신 여선생님을 극진히 섬기고 따랐다. 선생님은 내가 열병을 앓고 있을 때 귤을 사 가지고 집으로 찾아와 어머니나 다름없는 눈초리로 나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이분은 꼭 1년 동안 우리를 가르치곤 일본으로 가 버렸다.

나는 이분이 떠난 뒤 마을 끝의 산 변두리를 쓸데없이 헤매 다니는 아이가 되었다. 돌아다니면서는 산속의 돌멩이들을 주워 와서 뒤꼍 장독대 앞에 쌓아 모았다. 그러고는 물을 주면 자란다는 수정 돌멩이란 것들에 날마다 열심히 바가지로 물을 퍼다 먹였다.

4학년 때의 어느 여름날 누구한테던가 몇 포기의 국화 모종을 얻어다가 그 수정 돌멩이들 새에 심어 놓았다. 국화는 그 맹랑하게 밝은 눈들을 떠서 피어나고 약 같은 냄새를 빚어냈다. 물론 이보다 전에도 국화라는 꽃을 나는 보아 왔지만, 손수 심은 국화가 꽃을 피우는 것을 보기는 이렇게 비롯했던 것이다.

그러고는 한 20년 가까이 국화꽃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마음 같지 않은 세월이라 절간으로 만주로 어디로 굴러다니노라고 그와 가까이할 겨를이 없다가 삼십이 넘어 해방이 되어서야 집 뜰의 국화꽃을 다시 차분히 보고 이것을 가꾸어 낼 겨를이 생긴 것이다.

1947년 가을 어느 날 밤, 잠이 잘 안 오던 끝에 나는 뜰에 피어 있는 국화꽃을 생각하며 한 편의 시를 썼다.

서정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