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gguk University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질마재 신화』(1975)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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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시전집을 읽을 때마다 일부러 찾아서 다시 읽어보는 시다. 메마른 마음에 물 한 동이를 쏟아붓는 듯한 신선한 느낌 때문이다.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저기에서 걸어오는 그 애.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리면 나를 보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그 애. 그러나… 그러나 한 방울도 안 엎질렀을 때 눈을 맞추고 웃는 그 애. 그 웃음. 아마도 그 애는 물 긷는 일에 사랑을 다 건 모양이다.
신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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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누군가에게 ‘젖은 눈썹’을 보이고 싶지 않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눈맞춤’을 이해하고, 서로의 눈짓을 공유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암호가 나와 상대에게 정서가 되고 신비가 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우리만의 신비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좋은 것’은 마음속에 한 번 들어오면 사라지지 않는다. 나와 상대의 암호가 신비가 되면 그것은 기억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연인들의 애정 표현을 보았을 때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양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