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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등록일 2025-04-18 작성자 관리자 조회 970

물동이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갓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질마재 신화(1975) 수록

 

삶의 정거장마다 그의 시를 따라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초록이 좋은지도 모르고 헤매다가 어느 날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걸 목격하게 된 내 인생도 미당의 시에 빚진 바 크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질마재 신화』를 읽고 또 다른 지평을 열게 되었다. 미당이 태어나 자란 그 시절 그 마을의 시간들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그림 여행을 한 것도 같다. 질마재는 정다우면서도 고독하기 그지없는 우리 모두의 고향이다.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질마재의 소녀가 자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 되는가? 인생의 굽이마다 마주하게 되는 미당의 풍성한 시어들은 우리 청춘의 비료였고, 영원히 기록될 모국어이며, 잊을 수 없는 편지다.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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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시전집』을 읽을 때마다 일부러 찾아서 다시 읽어보는 시다. 메마른 마음에 물 한 동이를 쏟아붓는 듯한 신선한 느낌 때문이다. 물을 길어 머리에 이고 저기에서 걸어오는 그 애.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리면 나를 보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그 애. 그러나… 그러나 한 방울도 안 엎질렀을 때 눈을 맞추고 웃는 그 애. 그 웃음. 아마도 그 애는 물 긷는 일에 사랑을 다 건 모양이다. 

신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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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누군가에게 ‘젖은 눈썹’을 보이고 싶지 않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눈맞춤’을 이해하고, 서로의 눈짓을 공유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암호가 나와 상대에게 정서가 되고 신비가 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우리만의 신비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좋은 것’은 마음속에 한 번 들어오면 사라지지 않는다. 나와 상대의 암호가 신비가 되면 그것은 기억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길을 가다가 연인들의 애정 표현을 보았을 때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엎지르고 걸어왔을 때」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양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