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연구소
Dongguk University
저무는 황혼
새우마냥 허리 오구리고
누엿누엿 저무는 황혼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굽이굽이 등 굽은
근심의 언덕 넘어
골골이 뻗히는 시름의 잔주름뿐,
저승에 갈 노자도 내겐 없느니
소태같이 쓴 가문 날들을
역구풀 밑 대어 오던
내 사랑의 보 또랑물
인제는 제대로 흘러라 내버려 두고
으시시히 깔리는 머언 산 그리메
홑이불처럼 말아서 덮고
엣비슥히 비끼어 누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
-『동천』(1968)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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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의 「황혼길」이란 노래를 듣는다. 미당의 시 「저무는 황혼」에 곡을 입힌 것이다. 장사익은 이 시를 ‘구부정하게 허리 굽은 늙은 엄마가 세상 떠나시는 노래’라고 하였다. 나는 이 시의 화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여성일 수도 있겠다는 발상의 전환과 마주하고서 새삼스럽게 미당의 언어가 지닌 그 크기와 진폭에 놀란다.
나의 스승은 미당의 시를 ‘봄에 농사를 지으려고 쟁기로 생땅을 갈아엎을 때 나는 생기로운 냄새’에 비유했는데, 이 시의 화자를 어머니로 읽는 순간 죽음이 관조적 비유가 아니라 실제 체험처럼 사실의 힘으로 내 영혼을 파고 든다.
나는 내 위로 누나가 여섯, 형이 하나, 나는 막내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일 년이면 전국 사방에 떨어져 있는 딸네 집, 그리고 두 아들 집을 한 차례씩은 들렀다. 어머니는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이 없다는 옛말대로 자식에 대한 걱정 근심으로 심장병을 앓아 그것을 다스리려고 늘 ‘소닷가루 아홉 말’을 먹었다는 말을 되뇌이시곤 하였다.
어느 날 이 시를 읽다가 눈물이 나기 전에, 먼저 가슴이 꽉 메어 왔다. 뇌혈관 질환으로 임종할 무렵, 저승에 갈 노자도 없는 것처럼 모든 언어를 잃고 내 얼굴을 응시하던 어머니. 눈을 깜박거리면서 아득하게 기억을 더듬던 모습이 “나도 인제는 잠이나 들까”라는 시행과 겹쳐서 말이다.
박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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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시전집』에 나오는 시들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저무는 황혼」은 ‘아, 시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는 시였습니다. 미당 선생이 돌아가실 무렵 중앙일보에서 이 작품을 다시 보고 「황혼길」이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요즘은 서정시의 운율이라든지 따스함이 점점 사라지고 난해한 시들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단편적이고요. 그런데 미당 선생의 시는 그 절묘한 전라도 사투리가 그냥 그렇게 따뜻하고 정감 있게 다가옵니다. 제가 미처 찾지 못했던 이런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들이 앞으로 저한테 많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장사익 음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