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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구

등록일 2026-03-09 작성자 관리자 조회 359

 

선운사 동구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동천(1968) 수록

 

1980년대 어느 해 봄, 배낭 하나 메고 선운사 동백을 보러 갔다. 일주문 못미처 길옆에 있는 시비가 눈에 띄었다. 미당의 육필로 새겨진, 「선운사 동구」였다. 시비 앞에 서서 돌에 새겨진 시를 읽으니 금방 시에 몰입되었다. 시 속 화자처럼 나도 “선운사 골째기”로 동백을 보러 오지 않았는가.

미당의 시 세계는 초기 시집부터 불교적 색채가 엿보인다. 이 시도 그 연장선에 있다. 시에서 선운사는 이름난 동백 군락지로서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불교 도량으로서 삶의 어떤 진면목을 깨닫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아직 일러 피지 않은 동백꽃처럼 진리가 도래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작년 것”의 ‘쉰 목소리’로 진창의 땅에 이미 동백 부처가 피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선운사 입구에는 두 개의 일주문이 있다. 하나는 실재하는 것으로 삶의 괴로움을 내려놓고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다른 하나는 ‘선운사 동구’쯤에 서 있는 것으로 그 문을 넘어서면, 붉은빛으로 펼쳐지는 삶의 원형이 살아 숨 쉬는 신화의 공간이 기다린다. 어느 문으로 들어서건 미당의 「선운사 동구」와 만난다.

송찬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