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p zone

등록일 2026-04-02 작성자 관리자 조회 34

 

   봄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 오는 하늬바람 우에 혼령 있는 하눌이여.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화사집(1941) 수록

 

그가 갔다. 텅 빈 겨울 하늘이 시리다. 이제 누가 있어, 이 징그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징그러운 노래를 부를 것인가. 뱀이 눈뜨는 이 산하의 봄을 누가 말해줄 것인가. 그의 영광과 오욕은 바로 나의 얼굴이었다. 시의 이마에는 몇 방울의 피가 늘 묻어 있다고 말하던 시인. 그의 죽음으로 길고 긴 서정의 한 시대가 접힘을 느낀다.

김용택 시인

------------------------------

「봄」은 짧은 시다. 비유도 없고, 대단한 철학적 사유도 없다. 짧은 시지만 시에는 충만한 봄이 있다. 시적 화자와 봄과의 동화가 너무 충만한 나머지, 마침내 ‘나’는 사라지고, 아파지고 싶다. 일개인인 시인으로서 아프지 않으면 슬프기라도 해야 한다. 저 국가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피고 지고, 눈뜨는 봄처럼 말이다.

“아무 병도 없으면”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 사이에는 생략이 있다. 나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물어본다. 이 두 어구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을 수 있느냐고. 이 시의 화자처럼 ‘아무 병’ 없는 학생들은 이 두 어구 사이에 들어갈 사연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 사연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연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그 생략되는 사이를 마련하는 것이 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선생인 나는 무슨 핑계든, 무슨 말이든 다 옳으니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시는 그 핑계, 그 설명을 빼먹은 그 공허의 박동에, 그 공터의 숨결에 거주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그 핑계와 공허와 공터가 넓을수록 시가 커진다고 말해준다. 그 텅 빈 곳을 상상하는 것이 시를 읽는 독자의 태도라고 말해준다. 시는 단어를 낚는 것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있고, 비언어에 있다고 말해준다.

김혜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