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연구소
Dongguk University
영산홍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푼 소실댁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너머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동천』(1968)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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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동 미당 선생 댁 사랑방에는 선생이 앉아 있는 등 뒤의 벽에 운보 선생이 그린 작은 그림 한 폭, 빨간 치마꼬리를 살짝 말아 쥐고 배시시 옆으로 돌아누워 낮잠 자는 소실댁의 툇마루가 보였는데요. 발치에 놓인 그 놋요강이 얼마나 앙증맞은지. 운보도 미당도 세상 떠난 뒤, 새로 개관한 질마재로 미당시문학관을 찾아가 봐도, 소실댁과 놋요강은 어느 산자락으로 가서 낮잠이 들었는지 보이지 않고 개펄에 소금발만 날이 섰데요.
김화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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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0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 속에는 넓고도 깊은 세상이 서려 있다. 산자락 오두막집 울 밑에서 시작하여 산 너머 바다, 그 바다의 갈매기에까지 이르는 넓은 풍경이 숨 쉬고 있다. 이 풍경들이 빚어내는 분위기는 어떠한가. 바다가 가까운 농촌의 늦은 봄 텅 빈 고요와 ‘소실댁’이 환기하는 적막함과 그 ‘낮잠’의 체념 섞인 쓸쓸한 나른함은 어떤가. 사람을 기다리는 저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의 숙명적인 막막함과 안쓰러움과 사는 일의 쓰디씀은 또 어떤가. 그런저런 것들이 겹쳐지면서 여러분도 가슴이 아릿한지.
3연의 표현은 ‘과연 이래서 서정주’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목일 것이다. 다른 어떤 표현이 이 ‘놋요강’ 하나가 감당해 내고 있는 그 착잡한 정서적 함축과 선명함을 대신할 수 있을지. 이 연으로 해서 시 전체는 생명을 얻고 있으며, 다른 연들의 나지막함에 뒤받쳐져 또 눈부셔지는 것이다. 이런 시를 만나면 우리는 차라리 그 시 속에 들어가 먹고 자면서 한 두어 달쯤 살다가 나왔으면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세상살이를 보는 우리의 눈이 좀더 깊고 그윽해질 터이다.
김사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