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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일의 신발코

등록일 2026-05-21 작성자 관리자 조회 244

 

초파일의 신발코

 

모든 길은 신발코에서 떠나갔다가
돌아 돌아 신발코로 되돌아오네.
판문점을 동서양을 돌고 돌아도
신발코로 신발코로 되돌아오네.

사월이라 초파일 밤 절간에 가서
등불 하나 키어 놓고 오는 그 길도
산두견새 울음 따라 돌고 돌아서
신발코로 신발코로 되돌아오네.

-노래(1984) 수록

 

서정주 시의 힘은 그의 언어가 무의식 속에 새겨져 문득 재생된다는 것에 있다. “스며라, 배암!”이나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같은 문장은 한국어에 지워지지 않을 인장을 남겼다. 좋은 시는 그것을 읽은 사람의 마음에 스며 삶을 대하는 태도로 남는다.

이 시를 만난 이후부터, 오래 걷거나 달리기를 할 때마다 리듬감 있는 첫 문장이 떠오른다. 초 단위로 과거를 떠나보내며 현재를 살고 미래를 맞아들이는 중인 우리는, 매 순간 “신발코로 신발코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첫발을 내딛는 셈이다.

부처님이 오신다는 초파일밤, 절간에 가서 등불을 켜고 돌아오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시에는 절에 갔다가 돌아오는 한순간만 담겨 있지만, 그 장면을 읽으며 짐작할 수 있었다. 무수한 간구와 슬픔과 기원이 만들어 내는 고요한 기도의 깊이를. 한밤의 두견새 울음이 신발코에 깃드는 쓸쓸함을.

이혜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