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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의 독백

등록일 2026-06-15 작성자 관리자 조회 591

 

꽃밭의 독백

—사소 단장娑蘇斷章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사소娑蘇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

-신라초(1961) 수록

 

‘물낯바닥’이라는 시어가 참 기막히다. 인간은 물거울에다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 시간이라는 한계 속에 갇힌 목숨인 것이다. 그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인 존재가 터뜨리는 시구가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인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꽃에게 문을 열라고 한 시인이 미당 말고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황홀한 번개이다. 벼락과 해일은 또 무엇인가. 시는 끝없이 싱싱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벼락과 해일은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는 단박에 뛰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요, 점수는 그것을 깨달은 후에도 점차로 닦아 하나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벼락과 해일의 길로 새로이 떠나는 시혼詩魂. 존재의 무력과 한계를 노래하면서도 굳이 열고 싶은 꽃의 문! 그 문 속에는 어떤 길이 나 있을까.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수캐마냥” 달려온 시인이 생의 중반에 이르러 숙명과 구도적 몸짓으로 부른 노래가 「꽃밭의 독백」이다.

문정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