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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

등록일 2026-08-18 작성자 관리자 조회 637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뚱아리냐

  꽃다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든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낼룽그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눌이다. ……물어뜯어라. 원통히 물어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촛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부다. 꽃다님보단도 아름다운 빛……

  크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은 입설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은 입설…… 스며라! 배암.

   -화사집(1941) 수록

 

「화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가장 놀라움을 느끼는 것은 화자와 뱀의 거리다.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징그럽다고 하고, 돌팔매질을 하면서도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로 뒤쫓아간다. 미당은 이러한 욕망의 착종과 모순의 뜨거운 피에서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것이 붉은색으로 표현되는 피이고 혓바닥이고 아가리를 지닌 뱀이다. 총칭하여 슬픔으로 태어난 인간의 몸뚱아리이며 그 원죄이며 생명이다. 미당은 바로 뱀이 살고 있는 뒤안길 방촛길을 시의 활주로로 이용한다.

그래서 뱀의 시적 진화 과정은 미당시의 진화가 된다. 뒤안길(땅)의 뱀이 바다로 나가면 거북이가 되고, 거기서 다시 하늘로 가면 천년 학이 된다. 붉은 피는 파란 물로 분해되고 그 맑은 물은 다시 하늘로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새가 되어 「동천」에서 보듯 애인의 눈썹 같은 초승달이 된다. 이윽고 우리는 미당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신라의 하늘을 소요하는 그의 점잖고 편안한 후기 시들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도 이따금 석유 먹은 듯 숨가쁜 갈등과 모순 속에서 어금니를 물고 징그러운 몸부림을 치는 「화사」의 시 한 편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뱀의 원형적 이미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삶의 뒤안길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까닭이며, 우리의 육체는 여전히 사향 방촛길을 달리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어령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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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처녀작에 대해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당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1930년대의 습작기 문학청년의 통례대로 1933년 이래 동아일보 문화면에 원고청탁을 받지도 않고 기고해 반나마 게재의 쾌미를 맛보고 지내던 한 소년이었는데, 「벽」이란 내 신춘 당선 시는 일반 기고로서 보낸 것이 신문 당사자의 혼동에서 그랬는지(?) 실로 우연히도 응모 작품 대우를 받아 당선까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작가詩作家로서의 나의 초기 정신과 예술의 한 모습을 보이는 마당에 놓여서, 「벽」이 동아일보의 당선 시였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꼭 처녀작으로 자인해 내세울 의무까지는 안 가져도 될 줄 안다.

그래 나는 내 처녀작으로 졸작 「화사」를 택했다. 이 시는 당선작은 아니지만, 첫 시집 『화사집』 속의 일군의 작품들과 더불어 내 초기 시의 특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물론 스물두 살에 쓴 이 미비한 작품의, 표현상의 여러 생경을 지금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대로 시인으로서의(습작생이 아니라) 초기의 한 모습은 되는 것이다. 이 시를 1936년 여름 경남 합천 해인사의 원당이라는 조그만 암자에서 몇 달 묵고 있는 동안에 나는 썼다.

서정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