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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히

등록일 2026-10-19 작성자 관리자 조회 556

 

  가벼히

 

  애인이여
  너를 맞날 약속을 인젠 그만 어기고
  도중에서
  한눈이나 좀 팔고 놀다 가기로 한다.
  너 대신
  무슨 풀잎사귀나 하나
  가벼히 생각하면서
  너와 나 새이
  절간을 짓더래도
  가벼히 한눈파는
  풀잎사귀 절이나 하나 지어 놓고 가려 한다.

   -『동천』(1968) 수록

 

※

이 시를 가만히 더듬노라면 나는 온몸의 맥이 풀리고 서늘해진다. ‘애인’과 ‘한눈팔기’와 ‘풀잎사귀’와 ‘절 한 채’로 이어지는 마음의 보폭에는 뭔가 아름답고 신비로운 바가 있다. 그리고 행간에 서린 허허로움, 덧없음과 혼곤함, 청초함들, 그 모든 표정의 착잡함을 시인은 ‘가벼히’란 어휘 하나의 절묘한 뉘앙스로 능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연시란 예로부터 대개 북받치는 그리움의 하소이거나 어긋남의 회한, 자탄, 원망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이 시가 보여 주는 마음의 길은 어떤가? 연정의 뜨거움과 조급함과 정면성을, 서늘함과 해찰과 엇지르기로 에돌아 지체시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그리움을 더 생생하게 보전하고 누리는 기술, 사랑의 총량을 키우는 기술! 이 독보적인 마음의 기술과 미학으로써 미당은 비로소 미당일 터이다.

김사인 시인